한국 극장가에 다시금 핑크빛 멜로 바람이 불고 있다. <건축학개론> 이후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던 정통 멜로 시장에 검증된 해외 IP를 기반으로 한 두 편의 화제작이 출사표를 던졌기 때문이다. 배우 추영우, 신시아 주연의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이하 <오세이사>)와 구교환, 문가영 주연의 <만약에 우리>가 그 주인공이다. 두 작품 모두 해외에서 큰 성공을 거둔 원작 소설과 영화를 한국적 정서로 재해석했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최근 아시아권 로맨스 명작들이 연이어 한국판으로 각색되었으나 원작을 넘어서는 흥행작은 드물었던 상황에서, 이 두 작품이 ‘리메이크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청춘의 기억과 상실, 한국적 감성으로 입다
관객들의 기대를 모으고 있는 <오세이사>는 이치조 미사키의 라이트 노벨을 원작으로 한다. 자고 일어나면 기억이 리셋되는 ‘선행성 기억상실증’을 앓는 소녀와 그녀에게 엉겁결에 고백한 소년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는 이미 일본 영화로 제작되어 국내 1020 세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바 있다. 한국판은 원작의 서정성을 유지하되 미스터리 요소를 걷어내고, 보다 발랄하고 친숙한 로맨틱 코미디의 외피를 입었다.
특히 이번 한국판 각색의 핵심은 ‘로컬라이제이션’에 있다. 일본 원작이 특유의 아련한 영상미와 음악으로 승부했다면, 한국판은 주인공들이 코인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스터디카페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등 한국 10대들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담아냈다. 김혜영 감독은 감정을 쌓아가는 과정을 더욱 풋풋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고 밝혔다. 이는 원작의 팬들에게는 다소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 지점이나, 한국 관객들에게는 더 깊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으로 보인다.
서울이라는 무대, 보편적 청춘의 초상
또 다른 주목작 <만약에 우리>는 넷플릭스 중국 영화 <먼 훗날 우리>를 리메이크했다. 베이징의 빈민가에서 꿈과 사랑을 키우던 연인의 이야기는 서울을 배경으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대학생 은호(구교환)와 정원(문가영)의 서사로 완벽하게 이식되었다. 대도시는 가난한 청춘에게 기회이자 착취의 공간이라는 설정은 국경을 초월한 보편성을 획득한다.
영화는 원작의 탄탄한 구조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행복했던 과거는 컬러로, 이별 후 재회한 현재는 흑백으로 표현하는 연출 방식을 고수했다. 꿈을 좇아 상경했지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소중한 사람과 자신마저 잃어가는 청춘들의 모습은 서울이라는 구체적인 공간 안에서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이러한 배경 설정은 단순히 영화적 장치를 넘어, 스크린 속 장소가 현실의 관광 명소로 변모하는 최근의 트렌드와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스크린 너머의 경험, 필름 투어리즘의 부상
이처럼 영화나 드라마 속 배경이 된 장소를 직접 방문하는 여행 형태를 ‘필름 투어리즘(Film Tourism)’ 혹은 ‘무비 투어리즘’이라 칭한다. 이는 단순한 관광을 넘어 자신이 사랑하는 이야기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몰입형 문화 체험이다. 여행자들은 번화한 도심이나 고즈넉한 풍경 속에서 작품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만끽하며, 스토리텔링과 모험이 결합된 새로운 가치를 경험한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필름 투어리즘은 국가 브랜드를 제고하고 관광객을 유치하는 핵심 전략으로 급부상했다. 영국, 뉴질랜드, 캐나다, 이탈리아 등 많은 국가가 자국의 고유한 매력을 영상 콘텐츠와 결합해 여행지로서의 입지를 강화하고 있다. 정부와 관광청은 제작 단계에서부터 협력하여 촬영지를 홍보하고, 관련 투어 프로그램이나 축제를 기획하며 경제적 파급 효과를 극대화한다.
한류와 결합한 한국형 스크린 투어리즘
한국 역시 이러한 흐름의 중심에 서 있다. <기생충>, <오징어 게임> 등 K-콘텐츠가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한국은 필름 투어리즘의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서울, 부산, 제주도 등을 방문해 드라마 속 장면을 재현하거나 촬영지 투어 앱을 활용해 명소를 찾아다닌다.
한국의 필름 투어리즘은 단순히 촬영지를 방문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음식, 패션, 음악 등 K-컬처 전반을 아우르는 복합적인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오세이사>와 <만약에 우리> 또한 서울과 한국의 일상적인 공간을 매력적으로 담아냄으로써, 향후 국내외 팬들을 스크린 속 장소로 이끄는 새로운 기폭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가상의 이야기가 현실의 여행으로 이어지는 이 선순환 구조야말로 콘텐츠 강국 한국이 가진 강력한 힘이다.